그 정도 사람이면 괜찮지

사실 반대로 나도 많이 차였다.

의외로 키가 커 부담스럽다고 거절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언니 높은 힐 신고 나간 거 아니야?”

“아냐. 이거 신고 나갔어.”

“됐어, 그런 못난 호빗족은 갖다 버려.”

3cm 단화 신고 나갔다 거절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는 동생이 위로했다.

옷을 잘 못 입어 별로라고 거절도 당해봤고, 사람 좋은데 끌리는 게 없다며 거절당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오답노트로 교훈 삼아 내외적으로 가꿨다.

친구의 친구. 아는 언니의 동창. 친척 언니 형부의 후임. 친구 신랑의 동창.

가뜩이나 없는 인맥 영혼까지 끌어모아 소개팅했지만 어느덧 서른둘.

스치기만 해도 남자가 붙었던 인생의 첫 황금기가 지나자 놀랍도록 소개가 끊겼다.

이때까지 가족들에게 내색을 보이지 않았던 건 일종의 자존심 문제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억울하네?

“엄마, 내 친구 부모님들은 이 사람 만나봐라, 저 사람 만나봐라 성화라는데.

두 분은 나한테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에요?”

알아서 잘 하겠거니 방목하는 건 좋지. 그건 매우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눈치껏 좀 주변에 찾아봐주실 수 없나. 서운했다.

“아빠 보험 관리해 주시는 분인데, 아는 집 아들이 그렇게 착실하고 괜찮다네? 집안도 평범하니 괜찮고.

너랑 동갑이래. 한번 만나볼래?”

오랜만에 소개라 전투력도 높고 설렜다.

심지어 만나보니 대화도 잘 통했고. 외모도 성격도 취미도 평범.

내가 그토록 목놓아 외쳤던 모든 면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여자는 서른 넘으면 사람 만나기 힘들다는 투정에

남자도 서른 넘으면 똑같이 사람 만나기 힘들다던 그는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무더운 태양빛이 조금씩 따스함으로 바뀌는 계절에 우리는 썸을 청산하고 정식으로 사귀게 됐다.

그런데 나는..

전혀 설레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이 나이에 데이트하는 게 뭘 그리 설렐 일이라고.

연애를 너무 오래 쉬어서 연애 세포가 메마른 거라 치자.

그래도.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당연히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 거잖아.

데이트 하던 중 내 말 한마디에 행복하게 웃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넌 좋겠다. 그렇게 행복해서.’

그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그 정도 사람이면 괜찮지.” 친구들 가족들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루두루 괜찮은 사람이니 잘해보라고. 단점 찾기 그만하고 장점을 찾아보라고.

“너 그러다 금방 서른다섯이야!”

엄마는 그렇게 까다롭게 굴다간 아무도 못 만난다 소리쳤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면 만나는 게 맞는 거야. 주문처럼 되뇌었다.

계속 소화가 안되고 컨디션이 안 좋았다. 처음엔 그냥 소화불량인가 싶었다.

밥맛은 없고, 먹으면 소화가 안되니 3주 만에 살이 3kg 넘게 빠졌다.

체력도 떨어져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병원 진료받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자 덜컥 겁이 났다.

몸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게 틀림없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위암이 많다던데.

연차까지 내고 큰 병원에 예약해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깨끗합니다. 보통 위에 어느 정도 염증이 있기 마련인데 보시면 아무것도 없죠?”

“그런데 애가 왜 이러죠?”

“글쎄요.. 지금으로썬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밖엔 드릴 말씀이 없네요.”

분명 수면 내시경이었는데 잠결에 의사와 엄마의 대화가 귀에 꽂혔다.

정신적 스트레스.

큰 병보다 그게 더 충격이었다.

아무 이상 없이 스트레스 만으로도 몸이 이렇게 나빠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처제는 연애가 하고 싶어, 결혼이 하고 싶어?”

무슨 고민이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던 형부는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봤을 때 처제는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거 같거든?

근데 자꾸 결혼할 사람을 만나려니까 힘들어하는 거 아닐까?”

“…….”

“사귀는 것도 그래. 그 사람이 안 보면 보고 싶고, 만나려고 준비할 때 막 설레고 그래?”

“아니”

“그럼 그건 순서가 잘못된 거야. 매일 보고 싶진 않아도 만나면 설레고 기분 좋아야지.”

“난 금사빠가 아니라 자꾸 상대방하고 속도가 안 맞는 걸 어떡해”

“그럼 그 사람한테 맞추지 말고 본인 마음에 맞춰야지.”

“사람마다 사람 좋아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잖아”

“그 사람을 좋아해서 노력할 순 있거든? 그런데 그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건 아닌 거 같아.

난 처제가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껏 그 정도 사람이면 괜찮으니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도 호감이 생기지 않자 ‘그 정도 괜찮은 사람을 좋아하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로 몸에 무리가 온 거였다.

더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주말 오후 건대 입구 카페 제일 구석자리.

눈을 맞추고 담담히 사실을 털어놓는 내 손을 그가 꼭 붙잡았다

“내가 더 잘하면 안 될까요? 시간이 더 걸려도 상관없어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그는 자꾸만 내 손 등을 쓸어내렸다.

“미안해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거 같아요.”

“정말.. 안되겠어요?”

“실수한 거 없고, 잘못한 거 없으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곱씹으며 자책하지 마요.

그냥.. 내 마음이 여기까지인 거예요.”

“일찍 고백하지 말 걸 그랬어요.”

“미안해요.”

“어쩔 수 없네요.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제가 먼저 일어날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영화 같은 이별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노래를 들었다.

사람들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라던 곡.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였다.